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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an Biennale

부산비엔날레는 1981년 지역 작가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탄생한 대한민국 최초의 비엔날레인 부산청년비엔날레와 1987년에 바다를 배경으로 한 자연환경미술제인 부산국제바다미술제, 그리고 1991년의 부산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이 1998년에 통합되어 부산국제아트페스티벌(PICAF)로 출범한 이후, 격년제 국제현대미술전시로 개최되고 있습니다.

부산비엔날레는 정치적인 논리 혹은 정책의 필요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라, 부산 지역미술인들의 순수한 의지와 자발적인 참여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여타 비엔날레와는 다른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지역의 미술인들이 보여 주었던 부산문화에 대한 지역적 고민과 실험성 등은 오늘날까지도 부산비엔날레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현대미술전, 조각심포지엄, 바다미술제의 3가지 행사가 합쳐진 경우는 부산비엔날레가 전세계에서 유일합니다. 또한 행사를 통해 형성된 국제적 네트워크는 국내 미술을 해외에 소개하고 확장시킴과 동시에 글로벌한 문화적 소통으로서 지역문화 발전을 이끄는 역할을 해왔습니다.

태동으로부터 39년째에 접어든 부산비엔날레는 현대미술의 대중화, 즉 일상 속의 예술 실현을 목표로 하여 실험적인 현대미술 교류의 장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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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자 2020-09-03 22:16

1918년 한국 부산 출생

1978년 부산에서 별세

임호, 〈을지로 3 10.5, 연도미상, 종이에 수채, 연필, 20.4×24cm

LIM Ho, Euljiro 3-ga, October 5, Unknown, Pencil on paper, 20.4×24cm

간결한 선과 특유의 드로잉 감각으로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정서를 표현한 임호(본명 임채완)의 작품은 서구의 흔적과 민족주의적 내용이 혼재되었던 근대 미술의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 받는다. 임호는 1950-70년대, 20여 년의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 작가로서 활동했지만 부산 지역의 근대 화단 형성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여러 활동을 통해 부산 미술계의 흐름과 동향을 소개했다. 그는 일본 오사카미술학교에서 서양미술을 학습하였고, 해방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몇몇 동료들과 예술가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한 방향을 모색해 나갔다

임호는 1947년 결성한경남미술연구회의 창립전(1949)을 통해 부산에서 작품을 발표했고, 서성찬 등의 작가들과 종군화가로도 활동했다. 이 후 1953년 부산에 정착하여 미술 교사로 재직하면서 미술계 전반의 다양한 활동을 주도했다. 일례로 부산에 정착한 해에 부산화가 김경, 김영교, 김윤민, 김종식, 서성찬 등과토벽회를 결성했다. 이 시기에 임호는 향토적이고 민족적인 특질을 반영한 리얼리즘 세계를 구축해 나갔다. 이는 당시 서울 등지에서 내려온 피난화가들의 작품에 대한 이질감과 그에 따른 저항의 표현이기도 했다. ‘토벽회는 결성 이듬해 3회의 동인전을 열고 난 후, 임호와 김경의 작품이리얼리즘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논쟁을 일으켜 해체되었다.

임호는 첫 개인전(1955. 6. 17.-6. 23., 미화당백화점 화랑)을 준비하면서 “회화라는 것은 즉흥적으로나 또는 손끝의 기교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진지한 사색과 고뇌와 피저린 고혁에서 비로소 회화 본질의 영성에 이르러질 수 있다”고 적고 있는데, 이는 그가 결성했던 ‘토벽회’의 취지문과 유관하다.

1955년 임호는 김봉진, 김종식, 성백주 등과 부산 아포로다방에서 《7월 동인전》을 개최하고, 이 외에혁토사’, ‘흑마등 여러 그룹의 동인으로도 활동했다. 1964년 부산공보관에서의 개인전을 계기로 같은 해 부산시문화상을 수상하며 부산, 일본 등에서 꾸준히 작품을 선보였다. 평소 도시의 풍경을 체험하고 관찰한 정황을 본인만의 시선으로 담고자 사생활동을 즐겼던 임호는 1974일요화가회회원들과 밀양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후 고혈압으로 쓰러져 57세의 나이로 작고한다. 지역성과 사실주의를 기저로 민족미술의 원형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임호는 부산 근대 미술의 중요한 작가로 평가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