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킵네비게이션

<무명옷을 입은 사람들>, 2024, 염색천에 바느질, 450x250cm.

한국의 역사 속 풀리지 않는 모순을 살펴온 김경화는 ‘개발 혹은 발전이라는 국가적 사명’ 이후 봉착된 수많은 사회병리적 문제의 근본 원인을 고민해왔다. 정전 협정이 이루어진 지 71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한 전쟁의 위기, 은폐/조작을 반복하는 역사, 이념 갈등으로 매일 혼란이 이어진다. <무명옷을 입은 사람들>(2024)에는 무명천에 물들인 들풀과 꽃, 나비와 나무가 여럿 겹쳐 보인다. 한국전쟁 당시 국민보도연맹 학살지 중 하나인 부산 사하구 구평동 동매산의 꽃과 풀이다. 학살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전국적으로 160여 곳, 적게는 10만 명에서 많게는 40만 명 이상의 희생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산과 계곡, 동굴을 따라 집단 매장하거나, 바다와 섬을 따라 집단 수장이 자행되었다. 동매산은 한국전쟁 당시 부산형무소 재소자들이 집단 학살된 장소 중 한 곳이다. 암매장된 재소자는 최소 160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2001년 처음으로 발굴이 있었다던 동매산 학살지 흔적을 찾아 한참을 헤매던 작가는 마땅한 표식을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 쓰러져간 희생자들의 피 얼룩 위로 번져갔을 꽃과 풀을 떠올렸다.

<수장된 사람들>, 2024, 염색천에 바느질, 450x250cm.

국민보도연맹 학살 중 집단 수장의 경우 희생자들을 두 명씩 묶은 채 돌을 매달아 깊은 물속에 가라앉혔다고 한다. 부산, 마산, 통영, 거제 등 바다를 끼고 있는 지역에서는 예외 없이 수장이 이루어졌다. 부산의 경우 오륙도 인근 해상, 다대포 앞바다, 서구 암남동 혈청소 앞 등지에서 집단 수장이 자행되었다. <수장된 사람들>(2024)은 어두운 밤 영문도 모른 채 무거운 돌과 함께 묶여 깊은 바닷속에 던져진 희생자들을 물에서 꺼내고 싶은 작가의 애처로운 마음이 묻어난다. 작품 속 새와 나비의 형태는 현재 한국의 멸종위기종들의 모습이다. 국민보도연맹 사건으로 한 가족이 몰살되어 대가 끊기거나,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연좌제로 숨어 살아야 하는 등, 사회 활동에도 많은 제약을 받았던 상황에 관한 비유다.

<조율>, 2024, 한복천에 바느질, 300cm.

알고 있지 꽃들은 따뜻한 오월이면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 철새들은 가을 하늘 때가 되면 날아가야 한다는 것들,

문제 무엇이 문제인가, 가는 곳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지고지순했던 우리네 마음이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해 왔었는지,

잠자는 하늘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주세요. 

1992년 가수 한영애의 노래 <조율> 노랫말의 일부분이다. 김경화는 동학을 실패한 혁명이라거나 소수의 종교 또는 과거에 멈춘 학문으로 여기지 않는다. 동학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소망했고, 온 우주의 생명들은 모두 존엄하고 평등하다고 주창했다. 그래서 작가는 동학의 ‘하늘님’을 우주에, 또 내 안에 있는 존재로, 만물과 내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사상으로 파악한다. <조율>(2024)에는 뭍 생명들이 서로 연결된 채 다투지 않고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이 담겨있다. 각자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하늘님’을 깨워 창조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되찾고자 하는 동학의 정신을 시각화했다. 오늘날 다른 생명과의 연결을 추구하기보다 각자도생을 삶의 가치로 삼는 세태에 대한 작가의 안타까움이 묻어난다.

김경화